출 처 :
http://blog.naver.com/chiyahn/20179126789
- 시간이 넉넉하시거나 조국의 역사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실 분은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 원문의 시작은 '5월의 노래' 가사의 아래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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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노래 (5.18 광주 민주화운동 영상 기록)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날
묘비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이렇듯 봄이 가고 꽃피고 지도록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해기우는 분숫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이여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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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폭동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부르는 이들은 시민군의 총기 사용의 불법성, 계엄령 하의 집회의 불법성을 거론하며 5.18민주화운동을 폄훼하려 합니다. 특히 이들은 5.17불법쿠데타가 과정 상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계엄령 확대 자체는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선포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맞선 것은 엄연한 불법이요 폭동이라는 궤변을 늘여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 폭동론을 신봉하는 이들의 주된 논리입니다.
시민 불복종 운동(civil disobedience)이 반드시 평화적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간디가 될 필요는 없지요. 물론 방법론에 대해서 아쉬움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독립 운동 당시 무장 항쟁보다는 민족 계몽 운동에 더 집중해야 했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듯이요. 하지만, 그렇다고 무장 항쟁을 "폭동"으로 표현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무장 항쟁에 아쉬움을 나타내는 것과 그것을 폄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른바 폭동론자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시민이 모든 일을 알 수 없었다, 광주 시민들은 유언비어에 휘말렸다는 둥 그 외에도 괴악한 논리를 사용하며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려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수많은 시민 불복종 운동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한국에 있었던 수많은 시민 불복종 운동의 몇 가지 예를 살펴보며 그 논리가 과연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부르기에 적합한 논리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기회를 가져보도록 합시다.
① - 1. 동학 농민 운동
구한말 조선 사회에서 심각했던 부패와 차별에 대한 불만이 농민들의 무력 항쟁으로 폭발하게 된 시민 불복종 운동입니다. 직접적인 계기는 고부군의 조병갑의 비리였지만, 농민군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원칙(四大名義) 을 내세우며 사회 개혁과 조선의 독립화를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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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부로 사람과 가축을 죽이지 마라.
2. 충과 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3. 왜양을 몰아내고 나라를 깨끗이 하라.
4.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있는 자들을 모두 박멸하라.
1894년 5월 농민군이 발표한 다음의 폐정개혁 12조는 당시 농민들이 무엇을 요구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 숙청
3. 횡포한 부호 처벌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처벌
5. 노비문서 소각
6.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7. 과부 재가 허락
8. 이름 없는 잡세 폐지
9. 인재 등용, 문벌 타파
10.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11. 공사채(公社債) 면제
12. 토지 평균 분작
안타깝게도 총 세 번에 걸쳤던 봉기는 모두 실패였습니다만, 동학농민운동은 당시 조선인들의 민중 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현재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동학농민운동의 무력 봉기의 대상이 외세였던 일본군에만 국한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인 우금치 전투(黃土峴戰鬪)의 교전 상대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일본군 뿐만 아니라 조선군도 포함되어 있었고(이 때 전투를 지휘했던 허진은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관리가 됩니다), 농민군이 처음으로 승리를 거뒀던 전투인 황토현 전투(黃土峴戰鬪)의 교전 상대 역시 일본군이 아닌 조선군이었습니다.
당시 농민들이 농민이 속해있던 조선의 군대를 향해 무력으로 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당시 조선 정권의 법통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동학농민운동을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 2. 을미의병
1895년에 있었던 단발령에 반발해 유생들이 일으킨 시민 불복종 운동입니다. 을미의병 당시 창의소 (倡義所)에서 조직된 의병들은 특히 경기 및 강원 지방에서 위세를 떨쳤는데, 강원도 춘천의 유생 이소응은 춘천부의 관찰사인 조인승을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1894년부터 의병을 일으킨 유인석 역시 기세를 몰아 충주에서 관찰사 김규식(金奎軾, 독립운동가 金奎植과는 다른 인물입니다)을 살해하게 됩니다. 이후 의병은 안동부를 점거하게 이르렀지만, 안타깝게도 부족한 훈련에 의해 관군에게 해산되고 맙니다.
당시 유생들이 유생이 속해있던 조선의 군대를 향해 무력으로 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단발령이 옳든 그르든, 그것이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은 칙령이었습니까? 당시 모든 의병이 단발령이 어떻게 선포되었는지 모든 과정을 다 알 수 있었을까요? 물론 둘다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을미의병을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 3. 을사의병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일어난 시민 불복종 운동입니다. 이 운동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 전의 의병 항쟁과 같이 민중이 자발적으로 의병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바로 최초의 평민 출신 의병장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의병 항쟁들은 주로 유학자들이 이끌었는데 반해, 을사의병에서 큰 성과를 이룬 이는 다름아닌 평민 출신 신돌석이었습니다. 이는 시민 불복종 운동이 정치적, 또는 사회적인 특권을 가진 이들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이 함께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당시 의병들이 의병이 속해있던 조선 관아를 향해 무력으로 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은 뭘까요? 을사조약이 옳든 그르든, 그것이 법적으로 유효하지 않은 조약이었습니까? 당시 모든 의병이 을사조약이 어떻게 불법적으로 선포되었는지 모든 과정을 다 알 수 있었을까요? 물론 둘다 아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을사의병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 4 . 3.1 운동
1919년 고종의 독살설로 말미암아 일어난 전국민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입니다. 3.1운동이 비폭력 운동이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시위대 중 일부는 평남에서 일본인 소장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살해하는 등 3.1 운동은 무력 항쟁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조선인은 3.1운동으로 조선의 독립을 이루지는 못 했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성립하는 쾌거를 이루게 됩니다.
당시 시민들이 시민이 속해있던 일제를 향해 무력으로 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 그리고 당시 시민들 중 일부가 조선인 경찰을 살해했음에도 이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을 생각해봅시다. 경술국치가 어떤 부당한 과정으로 이뤄지게 되었는지 일반 조선 시민들이 모두 알고 있었을까요? 물론 아니지요. 또한 고종의 독살설은 지금도 논란이 되는 부분인데 조선 시민들은 그렇다면 유언비어에 "선동" 당해 3.1운동을 일으킨 것일까요? 이러한 황당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3.1운동을 폭동으로 부르지 않고 헌법 전문에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 - 5. 나석주 의사의 의거
나석주 의사는 1926년 시민 불복종 운동의 일환으로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집니다. 그는 자결을 시도하다 끝내 붙잡혀 사망했지만 김상옥과 함께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끈 인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나석주 의사가 무력을 이용해 권력에 맞섰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거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 그리고 나석주 의사가 당시 민간인이 있었던 은행과 사옥에 폭탄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석주 의사의 의거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①-6. 4.19 혁명
1960년, 2.28대구학생의거와 3.15부정선거로 시작된 전국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입니다. 2.28대구학생의거에서 고교생들은 모교의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며 시위를 시작했고(당시 일요일은 민주당의 유세가 있었던 날입니다), 이는 차후 3.15부정선거의 부당함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3.15부정선거에 분노한 시민들은 급기야 투표함을 불에 태우기까지 이릅니다. 그러자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며 배후에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경찰차를 전복시키고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심지어 카빈 총까지 탈취한 시위대에 의해 마침내 이승만은 대통령직 하야를 선언합니다.
당시 시민들이 시민이 속해있던 대한민국 정부에 무력으로 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 그리고 당시 시민들이 계엄령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당시 모든 시위대가 부정선거가 진짜로 부정선거임을 모든 과정까지 알고 있었을까요? 게다가 시위대가 파출소를 파괴하고 총기를 탈취하고, 당시 정부는 공산주의자가 시위대의 배후에 있었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4.19혁명을 폭동으로 부르지 않고 4.19혁명의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을 헌법 전문에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①-7. 부마 민주 항쟁
야당 정치인의 제명과 박정희의 유신 체제에 저항한 부산과 마산 시민이 1979년에 일으킨 시민 불복종 운동입니다. 대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이 시위에서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유신정권 퇴진과 정치탄압 중단을 외치자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이는 역부족이었습니다. 10월 20일까지 지속된 시위는 파출소, 구청, 방송국, 그리고 세무소가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당시 시민들이 시민이 속해있던 대한민국 정부 무력으로 대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 그리고 당시 시민들이 계엄령을 위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까닭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파출소, 구청, 방송국, 그리고 세무소는 시민의 공공자산인데 시위대가 이러한 공공 시설들을 파괴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마민주항쟁을 폭동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②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적합한 명칭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부르기 위해 동원된 논리들이 어디에 사용되는 논리인지 확인함으로써 그것이 왜 이른바 폭동론을 옹호하기에 사용될 수 없는 논리인지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일부는 폭동이라는 말을 지양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사태"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이것이 중립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하지만, "사태"라는 용어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한 신군부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의의를 폄훼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므로 이 또한 지양하는 것이 알맞습니다.
사실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의 당위성을 제하고서, 1988년에 노태우 정권 하에서 여야 의원이 구성한5.18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서 이미 5.18광주민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1993년 출범한 문민 정부는 현 정부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상에 있는 정부임을 확실히 해두었죠. 이렇게 이미 국가 차원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명명했음에도 불구하고5.18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 이나 "사태" 등으로 왜곡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은 앞서 이야기했듯 다른 역사마저 왜곡할 수 있는 폭동론의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성과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정부는 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민주화운동으로 부르게 되었을까요? 대한민국 정부는 정치적인 의도에 따라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성과를 전혀 살펴보지 않았거나 그것을 과장한 것일까요? 이러한 음모론을 믿으신다면, 5.18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무엇을 요구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선 민주화 운동이 무엇인지 정의해봅시다. 민주화 운동은 민주화(民主化)를 목표로 한 운동입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민주화를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 또는 그렇게 되게 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적이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말그대로 민(民)에 해당하는 이들이 국가의 주(主)된 존재로 자리잡았다는 것이지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민주화를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에 있는. 또는 그런 것."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위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민주화 운동은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 이해돼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시민들이 목표했던 것이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우선 1980년 5월 25일, 광주 시민들이 조직한 수습대책위원회는「광주사태 원인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유인물에서 " 5월 18일과 19일에 자행된 공수특전단의 살상만행이 80만 시민을 분노케 하고 정당방위로써 시민봉기(의거)에로 유도했다."라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의 목적이 공수특전단으로부터 시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다음 날인 5월 26일, 구 수습대책위원회인 광주시민학생구국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민주시민회보」 제10호에서 다음과 같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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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명분 없는 비상계엄의 해제와, 반민족적이요 역사를 역행하는 유신세력의 일소를 위해 끝까지 싸운다. 이는 민족사의 요청이다.
2. 우리는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득세하는 현 정부당국을 국민의 정부로서 인정할 수 없다.
3. 온 국민의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고 자립경제를 이룩하고 복된 사회를 건설코자 납입한 피와 땀(세금)으로 페퍼포그•최루탄 및 총기를 수입하여 국민의 배를 가르고 가슴에 총을 쏘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 광주시민은 이들 유신 미치광이들을 위한 세금이요 방위성금이라면 단 한 푼이라도 납입하기를 거부한다.
4. 광주의거에 관한 계엄사의 발표 일체가 거짓임을 밝힌다. 또한 이를 신뢰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사상자 천 명 이상ㅡ수습대책위 통계).
5. 우리 80만 광주시민은 앞면의 '광주시민 장송곡'을 누구나 부를 수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회보를 입수하신 분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보급 및 전파에 최대의 힘을 역주하여야 할 것이다.
6. 군인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이 유인물들로부터 우리는 광주시민들이 당시 비상계엄의 해제, 전두환을 위시로 한 군부 세력의 퇴진, 계엄군의 무차별적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 그리고 군의 정상화를 요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그 외의 유인물들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찾을 수 있으니 이것이 단순히 소수의 의견에 불과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를 살펴보십시오). 군부 세력의 퇴진, 계엄군의 무차별적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 그리고 군의 정상화 모두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는 데에 필요한 요소라는 점은 함께 동의할 수 있는 바입니다:
첫째, 비상계엄의 확대로 김대중과 김영삼 등 유력 야당 인사들은 가택 연금과 구금을 당했으며 무려 2699명에 달하는 이들이 체포되었습니다. 10.26 사태 이후 관련자 처벌 등으로 인해 안정된 시국에도 불구하고 계엄령은 시민의 집회 및 시위를 금지함으로써 명백하게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5월 15일까지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태를 막기 위해 시민들이 16일과 17일에는 평화적인 집회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비상 계엄 확대를 주도함으로써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신군부 세력은 12. 12 군사 반란과5 . 17 불법 쿠데타을 통해 헌정 질서를 파괴했습니다. 당시 시민들이 그 모든 과정을 인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군부가 정치 권력의 실세에 들어선 것은 "국민이 모든 결정의 중심이 되는 것"과는 명백하게 동떨어져 보이는 것으로 군부 세력의 퇴진은 분명한 민주화 요구입니다. 세번째,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시민들에게마저 광범위하게 곤봉으로 무차별적 폭력을 취한 계엄군은 시민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이에 맞서 시민들이 자위권을 발동하며 군의 정상화를 요구한 것은 명백하게 민주화를 위해 행동한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달성이라는 목적을 이루지 못 했다는 이유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사태" 또는 "폭동" 이라는 왜곡된 이름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논리가 잘못된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부마민주항쟁이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루었습니까? 3.1 독립운동이 조선의 독립을 이루었습니까? 민주화 운동에서의 민주화란 결과가 아닌 항쟁을 이끈 주체의 목표를 뜻하는 것입니다.
또다른 황당한 논리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광주에서만 일어났다는 점을 들어 전체 국민의 뜻을 대표하지 않는다며 이를 또다시 폭동론의 연장선 상에 두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선 5.17 비상계엄확대에 대항한 곳은 광주가 유일합니다. 이에 대해 방금과 같은 논리를 사용하는 이들은 광주에서만 시위가 일어났다는 이유로 광주 시민들이 당시 침묵했던 다른 대한민국 국민의 뜻을 대표할 수 없다는 괴악한 주장을 늘여놓고 있습니다. 이들은 역사에서 다수의 동의로 당위성을 재단하는 오류 역시 무시한 채, 다른 지역 국민의 침묵을 계엄령에 동조하는 것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정치활동, 시위, 그리고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타 지역 시민들이 반대 의견을 내기 극히 힘들었던 점을 간과한 까닭입니다. 이같은 황당한 논리를 사용하자면 북한과 중국 등 민중봉기가 이뤄지지 않은 나라는 모두 시민들이 현정치 체계에 동의하는 정상적인 나라입니다. 일제강점기 때의 제1차 광주학생운동은 왜 광주에서만 일어났는지, 2.28 대구 학생 의거는 왜 대구에서만 일어났는지, 부마민주항쟁은 왜 부산과 마산에서만 일어났는지 음모론을 제기한다 생각해보십시오. 오히려 그것은 당시 광주 시민들의 용감함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대한민국의 입법부,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 모두에서 공식적으로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된 것을 단순히 정치적인 오판으로 왜곡하는 것은 음모론에 다름 아닙니다. 시민들이 요구했던 사항들을 고려해볼 때도, 5.18광주민주화운동은 민주화 운동으로 불려야 알맞습니다.
③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의의를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
왜 우리는 역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역사학에 있어서 매우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유명한 역사가 애드워드 카는 역사는 현실의 거울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역사가 교훈이 되기 때문에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하지요. 하지만 이런 해답은 역사를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 데에 당위성을 주지는 않습니다. "일본이 다시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하고, 척화비가 한반도에 세워지고, 몽골군이 남한을 침략하는 일이 있을까요?" 라 생각하는 분들 역시 많지요.
역사에 앞서 역사의 배경이 되는 국가에 대한 본질적인 얘기를 해봅시다. 국가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요? 국가는 국가관에 기초해 형성됩니다. 국가관이 없으면, 국가도 없겠지요. 한 나라의 국가관은 그 국가를 규정하는 법률로 규정되고, 그 법률은 바로 법률들의 가장 기초적인 법률인 헌법에 기초해 있습니다. 즉, 국가는 국가관에 기초해있으며, 국가관은 바로 국가의 헌법에 기초해있다는 것이지요. 대한민국 헌법 제1호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인 7월 17일에 제정된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바로 국가관의 정립이 정부의 수립보다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권리는 어떻게 절대적인 가치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가치가 절대적인 가치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요? 헌법 상에 명기된 권리는 모두 추상적인 문장에 다름 아닙니다.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자연권의 존재를 부인하며 권리라는 것은 단순히 사회적인 승인에 의해서만 효력을 가진다고 이야기 한 바 있죠. 비슷한 맥락으로 현대 철학자 매킨타이어는 극단적으로 인권이란 존재를 입증할 수 없는 허구에 가깝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헌법 상의 권리가 실존하는 명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헌법 상의 권리의 선험성, 즉 헌법 상의 권리가 이 세상에서 절대적인 가치임을(선험성 자체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가정"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또다른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헌법 상 명기된 권리를 보편적이라고 가정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이 행동으로서 실천한, 역사라는 실존적인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민은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합니다. 하지만 불과 100년 전에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의 불평등한 역사 속에서 인간의 평등함이 달성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역사를 근거삼아 인간의 평등함은 실재하는 권리로 헌법에 규정되게 된 것입니다. 권리 뿐만 아니라 의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국방의 의무가 실제로 올바르든 올바르지 않든) 대한민국 헌법에는 왜 국방의 의무가 명기되어 있을까요? 바로 한국전쟁에서 경험했던 끔찍한 고통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국방의 의무가 지금처럼 당연하게 여겨졌을까요. 국방의 의무가 비교적 정당성을 얻게 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전쟁을 통해 얻은 비극의 경험을 통해 가능했습니다. 실험이 자연과학에서의 이론을 공고히 한다면, 역사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당위적인 명제를 공고히 한다는 것이죠.
물론 권리라는 것이 단순히 역사를 통해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권리에 대한 철학적인 명제, 그리고 이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합의가 모두 있을 때 권리는 정당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두가지 모두의 기초에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역사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은 우리 헌법 상에 규정된 권리와 의무를 공고히 하고, 이에 대한 논의를 더더욱 활발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의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 발현된 불의에 대한 항거의 정신은 우리 헌법 전문에도 명기되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숭고한 가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야만적인 반민주적 조처와 불법 군사 쿠데타가 어떤 결과를 낳게 만드는지 폭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몇 년 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기하기를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입니다. 우리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말이지만,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대한민국에서 실존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시민의 행동으로써 실천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굳건히 서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숭고한 헌법적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의의를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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